1999년 11월 30일
오랜만의 끄적임
소설중 꽤 괜찮은 대사가 있어 옮겨봅니다.
출처는 네이년(...........)
< 백년의 고독 / 가르시아 마르케스 >
* 사람은 죽어야 할 때 죽는게 아니라 죽을 수 있을 때 죽는거라고 아버님께 말씀 드려주세요.
* 아르까디오는 사랑 때문에 생기는 불안감이 무엇이라는 것을 알았던 방에서 불과 몇 미터 떨어져 있는, 처음으로 권력의 확실함을 경험 했던, 한쪽이 부서져버린 그 학교에서 형식을 갖춰 죽는다는게 우스꽝스럽다고 생각했다. 실제로 그에게 중요했던 것은 죽음이 아니라 삶이었고, 그랬기 때문에 사형이 선고되었을 때 그가 느낀 감정은 두려움이 아니라 삶에 대한 향수였다. 마지막 소원이 무엇이냐고 물었을 때까지 그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 견딜 수 없는, 미쳐버리고 싶은 / 밀란 쿤데라 >
* 사실 그는 그녀를 만나기 전의 여자들에게는 거칠게 군 편이었다. 그렇다고 특별히 무자비한 모습을 보이거나 냉혹하지는 않았지만, 한때 거친 남자가 되기를 몹시 원했던건 사실이다. 물론 철없던 시절의 욕망이었다. 대개 유치한 욕망들은 성숙해지면서 유혹에 저항하는 법이지만, 때로 나이가 들어서까지 그대로 남아 있는 경우도 있기 마련이다. 게다가 어떤 역할을 구체화시킬 필요가 있을 경우 유치한 욕망은 재빨리 그런 기회를 이용하려 한다.
< 종이시계 / 앤 타일러 >
* 그렇지만 매기는 잊지 않았다. 종종 뚫을 수 없는 유리막과 같은 아이러의 불만스러운 표정을 보면서 그녀는 이 지상에서 진정한 변화라는 것은 있을 수 없다는 것을 어렴풋이 깨달았다. 남편은 바꿀 수 있어도 상황은 바꿀 수 없다. 사람은 바꿀 수 있었도 상황의 본질은 바꿀 수 없기 때문이다. 우리는 모두 다람쥐 쳇바퀴 돌듯 살아가고 있을 뿐이라고 그녀는 생각했다. 이 세상은 마치 저 유원지에서 빙글빙글 돌아가는 작고 푸른 찻잔 같고, 사람들은 모두 원심력에 의해 제자리에 고정되어 앉아있을 뿐이다.
< 독일인의 사랑 / 막스 뮐러 >
* 두 인간의 영혼이 만나는 것이, 소용돌이치는 열풍이 모았다가 훑어 버리는 저 사막의 모래알의 만남과 같을 수는 없지 않은가. 행운이 마주치게 한 우리의 영혼들을 꼭 붙잡아야 한다. 왜냐하면 그 영혼들은 우리를 위해 점지된 것이니까. 그것을 위해 살고 싸우며 죽어갈 용기만 갖고 있다면, 어떤 힘두 우리에게서 그 혼을 뺏아가지 못하리라.
*인간의 마음에 생겨나는 최초의 공포는 신에게서 버림받는 일일 것이다. 그러나 생활은 그 공포를 몰아낸다. 바로 신의 형상에 따라 창조된 인간들이 외로움에 빠진 우리를 위로해 주기 때문이다. 그러나 인간의 위로와 사랑마저 떠나가면, 우리는 실로 신과 인간 모두에게서 버림 받았다는 것이 어떤 것인지를 절감하게 된다.
* 아, 인간은 왜 이다지도 삶을 유회하는 것일까. 매일 매일이 마지막 날일 수도 있으며, 잃어버린 시간은 곧 영원의 상실임을 생각하지 않고, 왜 이렇듯 자신이 행할 수 있는 최선의 것과 누릴 수 있는 최고의 아름다움을 하루하루 미룬단 말인가.
< 정체성 / 밀란 쿤데라 >
* 우정이란 기억력의 원활한 작용을 위해 인간에게 필요 불가결한 것이야. 과거를 기억하고 그것을 항상 가지고 다니는 것은 아마도 흔히 말하듯 자아의 총체성을 보존하기 위한 필요 조건일 거야. 자아가 위축되지 않고 그 부피를 간직하기 위해서는 화분에 물을 주듯 추억에도 물을 주어야만 하며 이 물주기가 과거의 증인, 말하자면 친구들과 규칙적인 접촉을 요구하는 거야. 그들은 우리의 거울이야. 우리의 기억인 셈이지. 우리가 그들에게 요구하는 것이란 우리가 자아를 비춰볼 수 있도록 그들이 이따금 거울의 윤을 내주는 것일 뿐이야.
< 향수 / 밀란 쿤데라 >
* 그리스어로 귀환은 <노스토스 nostos>이다. 그리스어로 <알고스 algos>는 괴로움을 뜻한다. 노스토스와 알고스의 합성어인 <노스탈지> 즉 향수란 돌아가고자 하는 채워지지 않는 욕구에서 비롯된 괴로움이다.
< 바베트의 만찬 / 이자크 디네센 >
# by | 1999/11/30 00:00 | 도서관을 꿈꾸는 창고 | 트랙백 | 덧글(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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